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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_적나라한 견성의 실체





그냥 내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체를 모른다고 하면 일체가 존재한다는 것만 남지, 누가 날 지켜보네 마네 이런 상 자체가 다 사라져 버리죠. 그냥 내가 존재한다는 거.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는 참나를 안 느낄 수가 없는 거죠. 누구나.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안 느끼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게 참'나'라는 걸 알기위해서 연습을 해야 되는 거죠. 바로 그거라는 게 안 와 닿아요. 그걸 알고 나면 참나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는 거죠. 그냥 나니까.

그런데 뭐가 다르냐? 그냥 내가 참'나'라는 것만으로 제 마음 안에서 어떤 안식이 오고, 초연함이 일어나면 참나를 알고 살아가는 거고, 그런 게 안 오면 그냥 중생이랑 똑같죠. 그러니까 또 참나를 찾지 마란다고 진짜 안 찾고, 그냥 그 전으로 돌아가라는 게 아니라고요, 참나를 따로 안 찾아도 참나가 늘 있다는 게, 그냥 '나'라는 걸아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데, 늘 존재하는 자리가 그 자리라는 거, 명상에서 만난 그 자리랑 같은 자리라는 걸 그냥 알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알고 살아가니까 느낌이 좀 은은하죠.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 자체가. 느낌이 은은하지만, 또 말 멈추면 또 그 자리에요. 자꾸 확인해 보시는 건 좋아요. 다만 확인을 통해서 어디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건 대게 중요해요. 뭐냐면 우리가 노력한다는 거는 틈이 있거든요. 분명히. 노력한다는 건 자꾸 끊어지는 행위지만, 이런 거죠.

늘 흐르고 있는 참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꾸 만나 본다는 것은 노력은 분명히 어느 한 지점에서 일어난 일이지 노력이라는 게 쭉 이어질 수 없어요. 그건 끊어지는 거죠. 노력이라는 건 에고가 하는 겁니다. 에고가 자꾸 확인해보고 싶은 거지, 참나는 늘 흐르고 있다는 거. 나 자신으로서. 그런데 에고 입장에서는 즉, 우리 생각 입장에서는 또 그게 궁금하거든요. 확인하고 싶거든요. 자꾸자꾸 노력은 계속 끝없이 하시라.

아무리 큰 도인이 되어도 끝없이 노력하셔야 되요. 노력은 죽을 때까지. 노력은 쭉 하지만, 어느 선을 가면 노력을 하건 안하건 그게 늘 흐른다는 걸 아는 상태가 오는 거죠. 그거 차이지, 다른 건 없습니다. 그래서 도인이라고 늘 참나만 보고 살아가는 거 아니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가는데, 그냥 원래 나니까. '나'라는 존재감이 참'나'라는 걸 알고 살아가는 거죠. 그냥.

그리고 '나'라는 존재감이 늘 느껴지기 때문에. 사실은 참나가 늘 느껴지는 게 되는 거죠. 그런데 뭐가 다르냐? 말만 멈추면 참나가 더 강해져 버리는 거죠. 참나를 알고 살아간 사람은. 모르고 산 사람은 한참 찾아야 되요. 그 느낌을 또 한참 찾아야 되요. 그런데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늘 그 자리만 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왜냐? 생각 감정 오감을 굴려야 되니까. 참나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깨닫고 나서 참나만 늘 보고 있다. 그러면 그 양반은 다른 거 안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백수나 폐인이신 거죠. 그러니까 그거는 의미 없는 말이에요. 어떤 분이 이렇게 얘기했다 치죠. "나는 견성이후 참나만 계속 보고 있으니까 내 몸도 잘 안 느껴지고 참나만 느껴진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느끼냐 하면 ‘별로 할 일 없으신 분이구나’하고 느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그 상태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또 이웃하고 노력하고 살아가다 보면 거기에 몰입하셔야 되기 때문에 참나를 그렇게 계속 믿기고 있을 수가 없어요. 문제는 그 참나나 이 참나나 똑같다는 걸 알아버렸다는 거죠. 그 사람을. 그래서 廓徹大悟확철대오 한 도인이 어디 앉아있나요? 오히려 자유롭게 돌아다니죠. 옛날에 선사들 중에도 廓徹大悟확철대오 하신 분은 오히려 저작거리에 나가서 그냥 뭐, 술도 드시고, 막 돌아다니시죠.

그 분이 얻은 경지랑, 어디 딱 숲에나 어디 고요한 데 앉아서 계속 참나만 느끼고 있는 분의 경지랑은 좀 달라요. 그래서 어떤 일반인이 볼 때는 몸도 덜 느끼고, 세상도 덜 느끼고, 참나만 강하게 느끼고 계신 분이 대단해 보이실지 모르고, 신비해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거기 더 들어앉아 있으면 그거나 이거나 상관이 없어져서 내가 돌아다니고 남하고 욕하고 싸운다고 해서 그 자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 정도 알기만 해도 절에서 廓徹大悟확철대오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저희는 더 안타까운 거죠.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기본이고,

그 다음 이 참나가 에고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지, 이거 모르시면 참나를 아무리 알아도, 참나랑 내 몸이 사라질 정도로 참나만 느끼고 있어요. 다 부질없어요. 참나 뜻대로 에고를 경영하실 수 있느냐가 제일 중요한 겁니다. 이게 지금 이런 거를 이 지구상에서 정확히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래서 제가 안타까운 거고.

참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게 신비중의 신비인데, 여러분 에고, 에고도 욕심도 여러분이 만든 거 하나도 없어요. 그렇죠? 여러분은 그 욕심이 일어날 때 거기에 과하게 끌려가느냐? 거기에 집착하느냐? 이게 이런 건 여러분이 결정하는 거지만, 그 애초에 그 에고의 끌림이나 이 모든 것들은요, 이 현상계에 나타남 이런 건 여러분이 결정한 게 없어요.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이지. 그게 신비에요. 참나가 하는 일이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아니에요.

아침에 눈을 안 뜨고 싶어도 눈을 떠야 되고, 때가 되면 떠야 되고, 눈을 뜨면 세상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오는 걸 어떻게 막아요? 여러분의 선택은요, 거기에 집착해서 탐진치로 끌려갈 거냐? 아니면 그거를 참나의 뜻대로 경영할 거냐. 그거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열반에 드네, 정토에 드네, 이런 게 다 부질없는 소리인 게, 여러분이 자꾸 여러분한테 오는 현상계의 모습을 여러분이 임의로 무슨 성인들한테 사정해서 바꾸고 싶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임의로 이런 게 안 나타나게 하고 싶다. 이런 것도 다 올바른 방향의 공부가 아닙니다.

올바른 방향의 공부는 그건 우주한테 맡기시면 되요. 여러분이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결정할 일은요, 내 마음에 뭐가 나타나건 참나의 작용이라는 걸 정확히 아시고. 왜냐? 왜 참나의 작용이냐? 이게 나잖아요. '나'라는 존재감 없이 생각이나 감정 오감이 존재할 수 있냐는 거죠. 이것들은 다 나한테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지금 괴롭다. 괴롭다는 게요, 이게 왜 예전 어른들이 그게 실체가 없다고 하냐하면, 괴롭다는 놈이 '나'라는 주어가 없이 술어가 존재할 수 있냐는 거죠. 내가 있으니까 괴로운 거거든요. 그럼 이 괴롭다는 것도 뭐에 의존해 있어요? '나'라는 존재에요. 슬프다도요, '나'라는 존재에요. 그러니까 괴롭다 슬프다 지금 눈앞에 있는 오감, 모든 것들이, 이 촉감마저도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내 마음에 이 촉감이 어떻게 존재 하냐는 거예요.

내가 없는 데 촉감이 있을 수 있어요? 많은 분들이 이걸 빼놓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오온이 허상이다. 이런 얘기할 때도 '나'라는 걸 빼놓고 오온의 허상을 얘기하면 허망한 말장난으로 돌아갑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만 오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오온이라는 존재는 다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 얘긴 뭐냐 하면 나의 작용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를 뭐라고 해요? 대승불교에서 공이라고 하는 거죠.

이 자리는, 이런 생각 감정 오감이 아니라 텅 빈 자리거든요. 시공도 초월해서. 그러니까 이 공성의 작용이라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애초에 우주에는 시공을 초월한 이 존재가 있기 때문에 시공 안에서의 생각, 느낌, 감정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성경에서 모세가 여호와 만났을 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물어보니까, 여호와가 뭐라고 그래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그러니까 누구로 인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나는 그냥 나다.” 그래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자리죠. 이 주어자리가 하나님 자리에요. 나다. 신약에서도 신약 성서에서도 예수님이 아이엠(I Am)이라는 걸 대게 중시해요. 이게 신의 이름이에요. 유대교에서는. 신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가 아이엠(I Am)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모든 설명할 때 아이엠(I Am)이란 말을 계속 써요. 나의현존을 뜻해요.

그런데 이게 단순히 이게 나의 현존이 아니라 신을 뜻해요. 예수님의 말에서도. 신. 신은요, 그냥 주어자리에요. 현존자리. 여기에 뭐가 붙어버리면 괴롭다 슬프다가 붙어버리면 작은 자아의 작용으로 변해요. 상황이. 그러니까 여러분 존재할 때 순수하게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말하실 수 있게 내가 나만 보고 계시면 견성자리죠.

견,
누가 봐요?
내가 보죠.

성,
뭐를 봐요?
내 본성을 보죠.

내가 나를 보고 있으면
그게 견성이에요.

거기에 남이 들어오면, 나 아닌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제 현상계가 펼쳐져요. 생각, 감정, 오감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나 아닌 것들이에요.

순수한 나인 것,
내가 나인 것만 보고 계시면
여러분이 우주의 전부가 되요.

그래서 이 명상을 하시다가 참나를 보면 내가 우주라는 걸 그냥 그 느낌으로 알아요. 왜냐? 온 우주에 나만 있다는 걸 알아요. 왜냐? 내가 나만 보고 있으니까.

상상을 해 보세요. 내가 나만 보고 있으면 거긴 남이 없겠죠. 그럼 내가 오주에 전부가 되요. 내가 신이고 내가 우주가 되는 거예요. 이게 가능해요. 만물은 다 가능한데, 이걸 생각을 통해서 의식을 그리 몰고 가야 가능하니까, 인간만이 하는 거죠. 동물들 중에도 혹 하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어요. 좀 영특한 존재가. 결국 어떻게 하면 하느냐? 자기의식을 돌이켜 보는 존재들은 견성을 할 수가 있어요. 누구나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들은.

어느 날 파리도 자기가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면 견성인 거예요. 그런데 그게 힘들다는 거죠. 그 파리의 뇌로는. 그래서 이 이간의 뇌가 대단한 게 자기를 돌이켜 볼 수가 있어요. 밖으로 나가는 의식을 돌려서 '나'라는 존재, 즉 여러분은 우주에서 어떤 신을 찾고 싶지만, 현명한 사람은 생각, 감정, 오감이라는 것들이 이원성을 가지고 있고, 시공 안에 존재한다는 걸 알아요. 이건 시공 안에서만 궤적을 나타내요.

‘나는 배고파.’ 라면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나 는 배 고 파’ 라는 말을 하려면 시간이 흘러야 되요. 시간이 안 흐른다.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시간이 안 흐른다면. ‘괴롭다.’ 이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공간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정립하려면 시공이 있어야 되요. 그런데 생각, 감정, 오감이 어디서 나오느냐? 나로부터 나온다.

그러면 그거 다 무시하고 나만 한번 보고 있어 볼까? 하는 인류가 출현했겠죠. 언젠가. 그 인류들이 견성법을 찾아낸 겁니다. 인간한텐 이런 기능도 있다라는 걸 알아냈어요. 알고 보니까, '나'라는 존재가 늘 있는 거지, 내가 있으라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런 삼매에 들어갈 때만 있는 것도 아니더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늘 있잖아요.

죽은 뒤에는 일단 우리가 얘기하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지금 까지 여러분 눈 감고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만 느끼시면 그 자리에서 나이를 느낄 수 있냐는 거죠. 나이도 알 수 없어요. 눈을 떠야 "아, 내가 40대구나" 아는 거지, 생각, 감정, 오감을 안 일으키고 그냥 존재하는 자리로만 존재하시면 나이가 없습니다. 그냥 존재지. 그 존재를 예전 어른들이 힌두교에서는 常我樂상식락. 영원하고 식은 '나'라는 거랑 똑같아요. 의식이 있고, 지복상태다. 常我樂상식락. 그렇게 씁니다.

불교는 여기다 뭘 더 보탰죠? 상락아정. 청정하다까지. 그래서 똑같아요. 힌두교에서는 상식. 의식 식. 영원하고 알아차리는 '나'라는 존재, 즉 의식이고, 지복이다 라고 그랬어요. 그 자리는. 순수 존재 상태..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왜? 거긴 걱정이 없다. 거기는 알아차리는 의식이다. 의식이 아닌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일반 에고의 의식이 아니라 영원한 의식이다. 거기에 불교는 청정하다까지 보탠 거예요.

생각, 감정, 오감이 오염시킬 수 있는 자리가, 번뇌가 오염시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인류가 알아낸 그 참나 자리에 대한 아주 위대한 설명입니다. 이거를 무시하시면 안 돼요. 마음에서 이 자리 찾아내시면 거기가 참나 자리거든요. “어, 여기는 시간성이 없네. 이 자리는. 그런데 나는 존재하네.” 그러니까 보세요. 이게 기독교 같은 신학이 어디 있습니까? 그 신학에서도 그렇게 아버지, 객관적 우주의 아버지 찾는 데서도 아버지를 설명할 때 아이엠이라고 한다는 건 상당히 주관적 설명이죠.

그러면 우리 마음 안에서만 찾아가는 불교에서도 들어가 보면, 결국 거기가 우주가 여기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죠. 결국 들어가 보면요, 시작은 밖으로 찾아나가건, 안으로 찾아들어가던 결론은 똑같아요. 시공을 초월한 의식자리를 찾게 됩니다. 찾고 보니 거기가 내 의식의 가장 근원자리, 그 상태가 우주의 제일 근원상태더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런 연구를 하셔야 되요.

연구를 취미로 자꾸 하시다가 "아, 내가 진짜 내 안에서 내 마음 안에서 찾아냈지만 여기는 시간도 초월하고, 의식이고, 여기는 걱정이 없는 자리구나. 이원성을 초월한 자리구나하면, 거기가 참나 찾은 줄 아시는 거고. 왜 참나가 신이냐? 생각해 보세요. 왜 참나가 신이냐? 이 아이엠도 결국은 나란 말이에요. 난데 여긴 신 자리죠. 그러니까 이게 나니, 아버지지, 헷갈리실 이유가 없어요. 왜 아버지를 '나'라고 하느냐? 참나라고 하느냐? 불경하게.

기독교 입장에서는 불교가 불경하죠. 왜 아버지인데 자꾸 '나'라고 하느냐? 진아니, 참나니. 나의 뿌리거든요. 나의 뿌리니까 결국 내가 내 에고, 자녀로서의 납니다. 생각, 감정, 오감. 여기서 부터 파생된 거니까, 파생된 자녀로서의 나. '나'라고 부를 만 한 건 생각, 감정, 오감밖에 없죠. 내가 '나'라고 부르는 모든 색은 생각, 감정, 오감으로 만들어진 거죠. 요걸 내려놔버리고, 뿌리에다가 다 던져버리고 존재했더니 결국 내 의식이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에고 입장이죠. 내 의식이라지만 사실 나도 아닌 거지만, 분명히 나의 뿌리도 맞아요. 그러니까 이게 골 때려지는 거죠. 나의 뿌리라는 의미에서 참나라고 부를 수도 있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더라는 거죠. 에고를 자녀로 봤을 때는 아버지가 되고, 부모자리가 되고. 결국 같은 '나'라는 입장에서는 결국 나의 근원이라는 입장에서는 그 자리도 난 거에요. 이렇게 해서 참나라고 부르는 입장, 아버지라고 부르는 입장이 둘 다 존중 되어야 됩니다. 한쪽만 얘기하면 안 돼요. 왜냐?

아버지라고만 하면 뭔가 나랑 동떨어진 존재로 생각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왜 굳이 '나'라고 부르냐? 내 의식 중에, 가장 근원이기 때문에. 그 자리가. 지금 내가요, '나'라는 말 할 때 '나'라고 할 때 에고만 얘기할까요? '나'라는 존재에서 부터 울림이 있지 않을까요? 에고라는 작용이 거기서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 '나'라고 할 때, 참나랑 에고가 지금 같이 대답하는 격인 거예요. '나'라고.

'나'라는 존재가 지금 이 주우에서 작용하고 있단 말이죠. ‘나’라는 에고의 말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나'라는 자각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다 참나로부터 나온 거잖아요. 그래서 이게 참나가 아버지다. 그 자리를 지금 우리 마음 안에서 찾아봅시다. 하는 겁니다. 이것만 해도 별 얘기 아닌데, 그냥 인류 중에 이걸 자각한 사람들이 나온 거예요. 이걸 도와주려고 기도도 시키고, 염불도 시키고, 108배도 시키고, 화두도 만들어서 가르쳐보고, 이거 알게 하려고요. 선문답도 던지고. 다 거기서 나온 거죠.

그런데 결국은 나만 알면 되요. 명상법 자체에 집착하지 마시고, '나'라는 걸 알기위해서 마음을 돌이키라고 가르쳐주는 거죠. 온갖 명상들은 그게 다 똑같은 원리인 게, 뭔가 하나의 대상, 마음 밖의 대상을, 생각을, 나한테 곧장 집중시키면 제일 좋은데, 이러면 바로 견성이고요, 이 생각을 바로 나한테 집중 못하면 밖에 있는 대상 중에 기도건, 그게 만트라건, 호흡이건, 뭔가 하나 주어서 여기 집중 시킵니다.

그래서 의식이 이 하나에만 집중하다보면요, 생각이라는 거는 굴러가야 맛인데, 하나만 보게 하고, 생각을 못하게 하면 생각이 침묵에 들어가요. 그러면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가 몰입이 이루어지면 사실은 에고가 점점 활성화가 덜 되고 참나가 나타나요. 뭐든지 몰입하시면 참나가 나타나요. 그래서 몰입이 되면 시공이 잊혀지고,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강해지는 겁니다. 어떤 거에 몰입하든. 오락에 몰입하건, 뭐.

그때 요 대상을 딱 치우고, 그 몰입에서 나타나는 내 내면의 나에 대해서 자각하게 되면 그것도 훌륭해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염불을 시키지만, 나중에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그 자가 누구냐?” 라고 물어보면 바로 딱 찾아버려요. 거기가 참나인 줄 알아요. 염불에 몰입했던 그 자리를 찾게 하면 그냥. 화두도 화두 하는 나를 찾는 거예요. 화두를 들었지만, 이 뭣꼬? 뜰 앞에 잣나무를 들었지만, 뜰 앞에 잣나무라는 것에 그 질문에 의문을 품고 몰입하는 나 자신을 찾게 되요. 결국은 그래서 견성으로 끝납니다. 만약에 그냥 이거면 견화두죠. 그런데 견성으로 끝나요.

시작은 간화,
‘화두를 본다.’에서 시작하는데,

결론은 견성,
나를 보고 끝나요.

결국은 어떤 대상을 걸 건, 대상에 대한 몰입이 지극해지면, 에고로서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참나가 등장합니다. '나'라는 나의 뿌리가 등장해요. 그때 '나'라는 뿌리에 딱 집중하면 사실은 끝나요. 그래서 진짜 이제 화두를 제대로 드신 분들은 선어록에도 다 그렇게 쓰여 있어요. 화두를 붙잡아서 나를 보라고 쓰여 있어요.

화두를 붙잡는데 나를 본다는 거는 화두에 몰입이 이루어지면 내 내면의 참나가 들어나기 때문에. 순수한 나가 들어나기 때문에. 이 아이엠이라고 하는 나의 존재감이 드러나요. 아이엠은요, 뒤에 뭐가 안 붙은 아이엠은요, 존재만으로 퍼펙트해요. 그러니까 이 술어를 안 붙여도 이미 퍼펙트해요. 그러니까 어떤 외부에 도움 없이도 스스로 온전합니다. 그 상태를 누리시면 존재하는 것만으로 벅차고, 감사하고, 사실은 결핍감이 없어져요.

그래서 이런 의식 자리가 우리 안에 있잖아요. 그래서 느껴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자꾸 느끼다보면, 어떤 명상법을 통해서든 똑같이 그 자리에 맞나 게 되어 있어요. 인간 의식은 별 수가 없어요. 인간 의식은 기도에 집중하건, 화두에 집중하건, 음악에 집중하건, 뭐 그림에 집중하건 무조건 그 초연함과 시공을 초월함과 이게 와요. 존재만으로 결핍감이 사라진 상태에 들어가요.

그 상태가 참나라는 걸 알게 된 사람은 심지어 결핍감을 느끼고 있는 중에도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결핍감을 느끼잖아요. 결핍감을 느끼는 중에도 참나를 사실은 안 놓치는 거죠. 사실 늘 있다는 걸 아는 거죠. 안심을 해 버리는 거죠. 그래서 남하고 싸우고 울고 웃고 해도 여여하다는 걸 알아요. 문제는 공부를 이 정도 해 놓은 도인들이 확철대오했다고 도인인양 해버리면 큰일 납니다.

이 상태는 이제 참나랑 친해진 정도에요. 이제 육바라밀 공부해야 되요. 그럼 그 참나랑 함께 어떻게 살아갈 거냐? 어떻게 밥을 먹을 거냐? 어떻게? 어, 깨워서 참나랑 함께 먹으면 되죠. 참나만 자각하면서 산다고 사람 노릇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천지 차이에요. 기독교도 똑같아요. 내가 하나님 자녀인 줄을 깨달았다고 성령 체험했다고, 성령 체험하면 그게 뭔 의미냐하면요,

내가 거죽의 나만 알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고아로서 살다가 아버지를 찾았잖아요. 내 뿌리를 찾았죠. 그럼 이 존재가, 이 에고가 뭐가 되요? 고아인 줄 알고 살았는데 아버지를 찾으니까 아버지의 자녀가 되요. 신분상승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체험을 해서 오는 신분상승을 稱義칭의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의로워졌다. 지금 내가 아무 짓도 안했는데 아버지 자녀가 되어버렸잖아요.

그냥 '나'라는 존재를 찾았을 뿐인데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되요. 이걸 신분상승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만족하면요, 전혀 하느님스러운 거룩함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오히려 아집만 생겨요. 무지와 아집만. 여기서 공부가 멈추면. 그래서 어설프게 견성한 도인들은 무지와 아집이 더 심해집니다. 즉 인간적 때가 더 심해져요. 이제 남 볼 때 목에 힘주고 보고, 난 아버지 자녀인데, 너네들은 지옥 갈사람. 난 천국 갈사람. 이런 망상을 품고 살아가요.

아니면 난 견성한 사람, 너희는 견성 못한 사람. 이런 헛된 생각이 들어와서 오히려 이 사람을 더 망쳐놔요. 아버지를 만난 뒤에 더 삐뚤어지는 격이죠. 아버지 뜻대로 사는 걸 지금 못 배운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는 것만 알았지, 지금 부자 수업을 못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돈 다룰 줄도 모르고, 사람 다룰 줄도 모르고,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요거 배우는 연습, 이게 재별 2세 수업 받듯이 여러분 경영자 수업을 받아야 되요.

이게 성화라고 하는 거고, 기독교에서. 성스러워지기 위해서 자신의 무의식까지 정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게 불교에서 앞에 게 돈오면, 내가 부처의 자녀인 줄 아는 게 돈오면, 나도 부처로서 당당히 행사할 수 있게 공부하는 걸 점수라고 합니다. 그건 왜냐? 점차 점차 되거든요. 내가 부처인 줄은 한방에 알 수 있어요. 왜? 원래 부처니까. 여러분 안에는 원래 부처님이 들어있어요.

여러분 지금 ..말하는 게 아니라 대승에서 말하는 부처는 여러분 불성을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불성이 그냥 부처에요. 퍼펙트한 부처에요. 여러분 불성은. 시공을 초월했기 때문에 그 불성자리는요, 닦아 갈 수도 없고 노력할 수도 없어요. 그러면 이미 퍼펙트 하겠죠. '나'라는 존재만으로 거기는 모든 게 퍼펙트한 자리에요. 그래서 그 자리가 비로자나불, 법신불자리에요. 문제는 뭐죠? 시공 안에 들어와 있는 여러분의 생각, 감정, 오감, 즉 여러분의 중생성이 문제가 되요.

이게 똑같은 겁니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은 온전하신 분이라 우리 안에 내려와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하나님 자녀가 되요. 모든 게 끝날 거 같죠? 그런데 자녀로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혀. 이 중생성, 유혹에 끄달리는 중생성이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절망에 빠져요. 오히려 공부하다가 기독교 예전에 사도들 중에 사도바울, 로마서 보시면 성령체험하고 나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 전에 받았던 스트레스랑 상대가 안 되는 스트레스를 받아요. 왜?

내가 어버지 뜻대로 하나도 살고 있지 않다는 자각이 와요. 그 전에는 그런지도 몰랐어요. 아버지를 안 만났기 때문에 잘 사는 줄 알았어요.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보니까, 내가 육정의 뜻대로, 육체가 시키는 대로 가고 있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못 간다는 자각이 와요. 이 분 공부 제대로 하신 거예요. 이제 거기서 스트레스가 와요. 그거를 극복해가는 게 육바라밀로. 바울 같으면 성령의 은총과 열매로 극복해 가는 겁니다. 에고의 힘으론 극복이 안 돼요.

끝없이 성령을 자각하면서 성령에서 오는 지혜와 능력으로 내 판단을 고치고, 내 하는 습관을 고쳐가면서 그냥 마구잡이로 습관 고치시라는 게 아니라,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하는 습관을 고치시라는 거예요. 양심에 맞는 습관으로. 모든 습관은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단, 양심에 어긋나는 습관은 반드시 고치셔야 되요. 양심에 맞게. “저는 젓가락질을 이렇게 하는데요? 남하고 다르게 하는데요?” 그 양심에 그렇게 찔리시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드시면 되요.

“주변에서 뭐라고 할까봐.” 뭐 이런 거는 좀 다른 문제잖아요. 양심에 찔리시냐고요. 그거를 하면 진짜 피해자가 나오냐고요. 그런 거 아니면 그냥 하시던 대로 살다가세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죠. 이런 사람도 있고. 우주에서 오히려 대게 희소한 사람이 되는 거죠. 독특한 습관을 가진.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양심에 어긋나는 습관. ‘이건 악이다.’ 하는 거를 여러분이 저지르고 있으면 고건 고쳐야죠.

그래서 여러분이 이게 공부의 다입니다. 우주에는 다른 수행법이 없어요. 왜? 뭘 보면 알 수 있는 줄 아세요? 여러분 에고 생긴 꼬라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수행법은 어떻게 나와요? 뭘 수행하는 거예요? 에고를 닦는 거예요. 에고 생긴 꼬라지를 보면 수행법이 빤해요. 인간이 수명이 지금 긴가요? 아니에요. 한 100년 안쪽이죠. 100년 전후죠. 100년 전후에. 자, 보세요. 에고라는 게 뭔지 정확히 분석이 되고, 우리 수명이 정해져 있고. 수명 정해졌는데 수명에서도 또 제약이 있어요.

한 서른 살은 되어야 정신 차려요. 앞뒤 빼고 나면요, 공부할 시간 뻔 하죠. 요 시간에 이 에고, 이 꼬라지를 가지고 참나의 도움 받아서, 참나가 뭔지가 나와야 되고, 무슨 짓을 할 수 있나, 그게 다에요. 수행은. 그 이상 바라시는 건 망상이에요. 인간한테는 그닥 그 조건밖에, 이 게임의 룰은 그겁니다. 이 게임의 룰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이 안에서 해야 되요. 뭘 할 수 있겠어요? 이 안에.

어떤 사람은 그 시간에 어디다 쓰냐하면, ‘계속 참나만 느끼고 있기. 숲에 들어가서.’ 여기다 쓰는 사람도 나와요. 제가 볼 때는 거의 자포자기죠. 이런 분은. 게임의 룰을 게임하라고 했더니 어디 괴물도 안 나오고 동료도 없는 그런 깊은 오지에 가서 계속 앉아있는, 접속하면 또 거기 앉아있고, 접속하면. 재미있을까요? 거기서는? 누가 와서 건들지는 않고, 딱 좋다라고 할 텐데, 레벨도 안 올라요. 괴물 안 잡았기 때문에 레벨도 안 올라요. 아이템 얻은 게 없기 때문에.

아이템 몇 개 딱 얻어서 숲에 들어가서 딱 앉아있는, 그런 게임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인류 중엔 있겠죠.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 다 있는데 보편적 게임의 룰이 뭔지 아시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뭘 할 수 있을까요? 육바라밀을 하시면 되요. 어마어마하게 득템을 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한테, 이웃한테, 혼자 있을 때, 직장에서 계속 육바라밀로 이 참나의 뜻대로 여러분 에고를, 자 남이 없는 데 누굴 경영해요? 여러분을 경영해야죠. 여러분 에고를 경영하고 있어야 되요. 왜?

하루에도 온갖 간신배들이 내 생각들 중에 간신배들이 나와요. 나를 꼭 아주 망쳐놓으려는 생각들이 나와요. 간신배들입니다. 나를 아주 도와주려는 생각들도 나와요. 계속 하루 종일 시끄럽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고거 경영을 계속 하고 계셔야 되요. 저는 혼자 살아서 별로 양심노트 쓸 게 없어요. 여러분이 잘 모르시는 거예요. 한 생각 한 생각이 일어나는 거 다 적어놓고 보면요, “이런 해괴망측한 생각을 내가 했을까?”를 하게 합니다. 그런 생각들을 그때그때 알맞게 육바라밀로.

자, 몰라로 깨어서,
선정으로 깨어서,
반야로 요 생각이 자명한지 본 다음에,
인욕으로 진실이면 수용하고,
거짓이면 물리치는 이런 연습,
요것만이라도 계속 하셔야 되요.

보시, 끝없이 내 생각만 하는 거 아닌지 주변 사람도 돌아보고. 주변에 누구 있건 없건 주변 사람도 돌아보고 마음에서. 주변 사람한테도 죄 안 지을 생각, 즉 지나가던 사람 누가 물어봐도 ‘나 무슨 생각합니다’하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생각으로 고쳐놓고, 이 짓을 혼자서 계속 하시면, 혼자 살아도 사실은 성자가 될 겁니다.

자기 에고 경영이, 이게 무의식까지 여러분 속에 뿌리박힌, 무의식에서 저장되어있다 끝없이 에고로 올라오는 업장까지 다 지워내요. 그러니까 여러분 가만히 계시면 올라오는 게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여러분 깊이 내재된 카르마에서 “지금쯤 술 한 잔하고 싶을 텐데.” 하고 올려 보내요. 그러면 그 생각이 확 에고한테 올라와요. 그러면 벌써 입에 침이 고이고, 이미 카르마대로 작동합니다.

자, 여러분 뇌에서 이미 카르마 작동했기 때문에요, 여러분이 의식한 거는 한참 뒤에요. 일이 진행된 뒤에요. 사실. 뇌가 이 물질이 작동해야 되니까 더뎌요. 여러분이 의식할 정도로 생각화 되었을 때는 이미 여러분 몸에서 이미 진행된 뒤에요. 입에 침이 이미 흐른다고요. 뭔 얘긴지 아시겠죠? 카르마가 이미 발동된 뒤다. 그래서 여러분, 생각했을 땐 이미 자유의지가 없는 거 같은 게, 생각했을 정도면 이미 카르마가 꽤 진행된 거예요.

그때라도 몰라 하면서 내보낼 수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몰라 해서 이겨낼 수도 있고, 어떤 카르마는 이미 발동해 버려서 안할 수 없는 지경에 간 일도 있는 거고요. 그러니까 어떤 일은 하고, 어떤 일을 안 할 수도 있고, 모두 막을 수 있다는 거 아니에요. 어떤 거는 이미 진행되어버려서 해야 될 수도 있어요. 단 하시더라도 양심에 맞게 육바라밀로 하실 수 있냐는 거죠.

즉 이런 무슨 불가항력적인 걸 하시라는 게 아니라, 이미 여러분 마음에 등장한 뒤에라도 육바라밀을 쓰시면 된다는 거죠. 그 전까지 찾아가서 쓰겠다. 그런 짓 하지 마시고요. 여러분 몸이 여러분 뜻대로 통제되는 게 아닙니다. 저 무의식의 영역에서 올라올 때, 그때 마다, 저 무의식 속까지 들어가서 나는 고쳐놓겠다. 그런 이상한 생각하지 마시고, 올라올 때라도 제발 잘 하세요.

그런 분들이 올라오는 거 다 놓치고, 있죠. 게임할 때요, 눈앞에 적한테 다 맞으면서, 저기 멀리 있는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망상을 품으시는 거랑 똑같아요. 눈에 안 보이는 적이랑 싸우겠다고, 보이는 적들한테 다 맞고 있는 거랑 같다고요. 나한테 제일 다가온 사람들도 급한 것 부터 계속 처리하시면서, 뿌리로 자꾸 파들어 가면 언젠가 근원도 다 고칠 수 있으니까, 지금 급한 거부터.

보세요. 여러분 지금 자꾸 뭔가 올라오죠. 뿌리를 캐고 싶어요. 뿌리가 보이나요? 안 보이죠. 그런데 올라오죠. 올라올 때마다 양심대로 처리해서 다시 재입력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언젠가 안 올라올 때가 나옵니다. 그럼 끝난 거예요. 그러니까 올라올 때마다 육바라밀을 해서 돌려가서 재입력하는 작업을 안 하시면서, 저 안에 있는 뿌리를 캐겠다고 덤비시면요, 그건 건들지 말아야 할 걸 건들은 격이 됩니다. 괜히 여러분 무의식을 건드려서.

지금 여러분이 나타난 적도 감당하기 힘든데, 적만 훨씬 늘여놓는 경우도 있어요. 잊어버린 기억까지 다 끄집어내서 적만 늘어놔요. 내 실력이 는게 아닌데, 적만 늘이면 이거 힘들어집니다. 지금 내 실력으로 눈앞에 있는 적을 하나하나 육바라밀로 처리하고 경영하는 거, 이 이상 제가. 에고를 봤을 때, 이 이상 공부라는 게 없어요. 단학이나 차크라는 몸에 그런 게 개설되어있어요. 요 힘도 끌어다 쓰시면 에너지가 채워진 만큼 육바라밀하는 힘이 커져요. 에고를 경영할 수 있는 힘이 커져요. 경영 안 되던 게 기운이 돌면 이게 경영이 됩니다. 그래서 하는 거예요.

이 이상 따로 인간의 심신의 뭐가 더 있다는 거를 고전을 뒤져보고 제 몸을 뒤져봐도 못 찾았어요. 요 정도 닦으면 인간은 탁월해 진다. 이 이상 바라시는 건 망상이다. 열반에 들기를 바라고 이런 분들은 제가 알기로 다 그분들 다시 태어나서 또 공부하고 있어요. 그런 헛된 생각하지 마시고 윤회를 거부하지 마시고, “윤회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말 날 때 마다요, 이 말 누가 하는지 물어보세요. 참나가 합니까? 에고가 합니까?

“윤회가 겁난다.”는 말을 참나가 하고 있나요? 에고가 하고 있나요? [몰라]하고 참나 상태에서 그런 말 나오나 보세요. 안 나옵니다. 참나 상태에서는 지금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참나의 신비로만 보여요. 그런데 거기에 걱정이 들어가면 겁나요. 윤회가. 왜?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져야죠. 또 한 생 동안 일궜던 거 다 놓고 다시 가야죠. 일 보는데 또 얼마나 고생스러워요. 우리 준호 보니까 일단 팔다리 못 움직인 채로 또 한 동안 있어야죠.

또 겨우 팔다리 움직여도 팔다리가 짧아서 뜻대로 잘 안되죠. 말도 안 나와요. 지금도 말을 잘 못해요. 그래서 보면 말 못하니까 답답해 죽겠는. 느껴져요. 뭔가 머리는 굴러가는데 표현은 잘 안 되고, 이 짓 다 격고 또 실현 당해야죠, 뭐 뭐 해서 결국 올라가서, 또 한 서른 살 되면 또 이런 인간의 문제 풀어야죠. 그것도 풀고 나면 또 가야죠. 다 놓고 가야죠. 이 짓을 계속 겪을 생각하면 겁나죠. 누가 겁날까요? 에고요.

이때 [모른다] 하고, 통으로 받아들이세요. 매 순간순간이 참나의 신비다. 윤회가 없이는 성장도 없다. 게임 한 번에 만렙 찍겠다는 거랑 똑같죠. 하면 할수록 늡니다. 윤회도 할수록 늘어요. 끝없이 윤회하시는 중에 실력이 는 거예요. 성인들은요, 윤회를 겁나하셔서 그래요. 할 때마다 일반인도 겁나했는데 왜 안 느나요? 할 때마다, 여러분 게임 많이 한다고 게임 잘하나요? 연구를 하면서 해야지 잘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생해 동안 연구를 하면서 한 사람들은 성인의 경지에 가 있어요. 만렙의 경지에 가 있어요. 할 때마다 그냥 마구잡이식으로, 내 마음대로 게임의 룰을 상정하고 덤볐던 분들은 윤회는 겁나 오래하시는데, 실력이 안 늘 수 있어요. 답답하죠. 이런 경우 만렙들이 가서 가르쳐주는 거예요. 보살이 별게 아니라, “돌겠네. 저렇게 까지 게임을 힘들게 할까?” 하고 가서 “제발 이렇게 좀 해보라”고 가르쳐주고. 그러다 그러다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만렙들의 가르침이 없이는요, 사실 못 올라가요. 사람마다 다 다양하니까. 기질들이.

이런 거예요. 타고날 때 기질은 비슷해도요, 잘못된 선택만 계속 해버린 분은요, 올라가기 힘든 경지에 가 계실 수도 있겠죠. 그걸 또 살려내는 것도 보살입니다. 가서. 누군가 게임을 계속 잘못해서 점점 멀리 가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가서 할 수 있게 계속 자극을 주고, 아이템도 빌려주고 이래야 된다고요. 인류는 이렇게 도와서 가는 거예요. 나 혼자 가서 성공하는 게임이 아니고. 도와서 도와서 가게 할수록 남을 도와줄수록 나도 또 실력이 좋아져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쁘죠. 만렙 되어서 나를 도와주더니 지 실력이 또 들어요. 계속 이런 식. “어우 재수 없다.” 할 수도 있지만, 계속 이렇게 공부되어서 올라가게 만들어져있어요. 열반에 든다는 건 게임 빨리 끄고 나가고 싶다는 건데,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런 분들 아까 제가 얘기했듯이, 어디 사람 없는, 괴물도 인적도 없는데 가서 혼자 앉아계시는 거랑 똑같아요. “진짜 편하다. 여기 있으니까.” 하고 앉아계시는 거랑 똑같아요.

게임이 지연 될 뿐이지, 열반사상 이런 거는 다 맞지 않는 소립니다. 에고 생긴 걸 알면요, 그게 에고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그게 죄를 지어서 나온 것도 아니에요. 참나의 신비라는 걸 알고 나면요, 에고를 없앨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나와 버려요. 공부를 이 정도하시면 윤회를 숙면통을 얻어서 전생을 다 보지 않으셔도 에고라는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시면 나와 버립니다. 답이.

에고를 어떻게 닦아야 되는지, 윤회니, 이런 사후 세계에 대해서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되는지, 이런 게 이번 한 생 살면서, 내 마음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만 정확히 포착하셔도 나온다니까요. 이런 얘기를 저는 저대로 그렇게 공부해 본 얘기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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