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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반야심경 제25강 반야심경 총정리2




안녕하세요, 오늘 반야심경 25번째 마지막 강의시간입니다. 여러분들 질문한 것을 가지고 계속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깨달음을 얻는 길이 불교에만 있나요? 다른 종교 수행에서는 꿈을 깨는 그런 깨달음의 가르침은 없는가요? //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어찌 불교에만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깨달음을 제1의 목표로 삼고 있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음을 가장 중요시 한다.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현상, 이것을 중요시 합니다. 물론 불교도 이런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요소보다는 깨달음을 통한 완전한 해방을 최고의 가치로 치고, 일부 불교 종파나 일부의 믿음을 통한 기적, 가피력, 이것을 주장할 뿐이에요.

그러나 다른 종교들은 다 믿음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 즉,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 여기에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고 자기 변화, 자기 성찰이 그 일부분으로 따로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최고 목표로 안하고 있다. 이런 차이는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 자기 성찰을 통한 깨달음, 또는 뉘우침. 뉘우침도 깨달음의 일종입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도 믿음을 제일 중요시 하지만 자기 성찰,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신부님이나 목사님이나 다른 종교의 사람 중에도 불교에 있는 스님들보다도 인격이 높으신 분이 있죠.

불교에는 깨달음을 최고로 치지만 사실은 실제로는 깨달음을 최고로 안하고 다른데 더 세속적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불교 안에 그런 고상한 인격이 안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요소가 다 있는데, 종합해서 볼 때 불교는 자기 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최고의 가치로 둡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류의 스승 될 만한, 참으로 나를 넘어서고 민족을 넘어서고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그런 가치, 그런 안목, 이런 것을 가진 사람은 불교 안에 불교수행자 중에 제일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위한 헌신, 나라를 위한 애국, 뭐 이런 수준에서 보면 꼭 불교가 아니라도 많은 가르침 속에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자연까지도 생각하는 이런 가르침이 별로 없어요. ‘살인하지 마라’ 이러지 ‘살생하지 마라.’ 이렇게 안 나가죠. 내 민족, 또는 많이 커야 인류정도이지, 거기에 만중생, 이런 관점의 폭이 적죠. 그래서 이렇게 뭘 해도 자기 종교나 어떤 민족적인 이런 울타리 안에 갇히기가 쉬운데 비해서, 수행자는 그런 울타리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스님들도 민족주의 이런 데 다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종파주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불법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는 최고다. 다른 종교는 나쁘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돼요. 그러나 불법과 차이는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어느 정도 연마하느냐에 따라서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원래 불법의 가르침에 선다면 종교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이런 거 갖고 논할 필요는 없다.

얼마나 자기 성찰을 통해서 얼마나 자기 행복을 가지고, 넓은 안목을 가지고, 높은 안목을 가지고, 고상한 인격으로 자기가 나아가느냐? 하는 게 중요하고, 그것이 비록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종파의 사람이라도 그런 인격이라면 우리는 존중해야 된다, 이 말이오.



질문2)
저는 다른 스님이나 어른들에게 윤회는 불교사상의 핵심이라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윤회를 모르면 불교 수행이 안 된다고도 하시고요. 그런데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아서 제가 신심이 부족한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뭔가 불안할 때는 전생이나 내생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윤회는 믿어야 되는지요.//

불교에서는 뭘 믿어라. 믿지 마라. 이런 애기는 안합니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고, 믿어지면 믿고, 안 믿어지면 안 믿어도 됩니다. 거기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불교는 뭐로부터 출발하느냐?
자기 현주소로부터 출발한다.
지금 내가 괴롭다.
“그래. 내가 지금 괴롭구나. 내가 지금 번민이 많구나.”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서 번민이 많다. 자식 때문에 번민이 많다. 돈 때문에 번민이 많다. 건강이 안 좋아서 번민이 많다. 뭔가 나한테 괴로운 번민이 있다.

그러면 이거 좋은 거냐? 안 좋다.
해결해야 될 거냐? 해결해야 된다.
여기로부터 출발하면 되요.
뭘 믿고 안 믿고 이런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이러한 번민의 원인 뭘까?
이것을 찾아야 됩니다.

번민의 원인이 뭘까? 여러분들 그러죠. 애가 공부를 안 해서. 남편이 술을 마셔서. 돈이 없어서. 그런데 이것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그 원인을 잘못 찾았기 때문에 해결도 안 되고 해결 되도 문제가 안 풀려요. 그래서 괴로움의 원인이 뭘까? 왜 괴로운가? 왜 괴로운가? 왜 괴로운가? 왜 화가 나는가? 왜 화가 나는가? 이렇게 근원을 추구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근원을 추구해서 들어갈 때 여러분은 그 괴로움의 본질을 보게 된다. 이게 자기 성찰이라는 거요. 자기 성찰이라는 게 혼자서 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게 아니에요. 고의 원인이 뭐냐? 그런데 혼자서 하면 두 번 세 번 들어가다 더 이상 안 들어가져요.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 거요. 아주 집요하게, 그 근원으로 이렇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되요.


질문3)
반야심경 17, 18 직강을 듣고 올라온 질문인데 이런 질문입니다. 진아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진아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 체험하는 자기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것들을 다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각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진아와 자아가 따로 있고, 진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견해를 갖고 계셨던 거 같습니다. 실제 않는 것은 오직 진아뿐이며, 이 진아는 단순히 보이는 대상 즉, 객관과 분리된, 보는 자, 곧 주체가 아니라 그 둘을 포함한 순수의식이라고 하였는데, 진아라는 게 없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시라면 그것이 왜 그런지 궁금하고, 주객이 분리되지 않는 의식 상태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해하는지, 어떻게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앞에서도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의식이 작용할 때 보면, 분명히 여기는 작용하는 주체, 보는 자가 있고, 보이는 대상이 있죠. 제가 여러분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보이는 대상이고, 여러분들은 제가 보이는 대상이 되겠죠. 그래서 보는 자가 있고 보이는 대상이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 보는 자를 주관이라고 보이는 대상을 객관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 보는 자를 자아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사실은 이 자아라는 것을 자꾸 연구를 하고, 연구를 하고, 연구를 하고, 연구를 해보니까 자아라고 생각했던 게 자아가 아니에요. 이게 실제로는 없는 거예요. 가아에요. 그래서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추적해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가짜 자기는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다 벗기고 나니까, 이것은 실제 아니더라. 나라고 했던 게 내가 아니더라. 그래서 결국 마지막 안에 뭐가 있더냐? 거기에 순수의식인 진아가 있더라. 지금 이런 논리에요. 이 질문은.

그래서 우리의 과정은 그 진아를 찾는데 있다. 이런 얘기인데, 여러분들이 우리 민족이라는 말을 쓰죠. ‘우리민족’이라 할 때는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우리 안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다 들어옵니다. ‘우리가족’ 할 때는 안에 남편이 다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들어오죠. 그러니까 ‘우리민족’ 할 때는 전부다가 나에요. 그때 인식이. 그러나 우리 가족 할 때는 딴 사람은 남이에요. 아내 남편 자식은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나하면 어때요? 아내나 남편이 남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이 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그때그때에 인식의 상태에서 이렇게 형성되어지는 겁니다. 이게 본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차를 타면 승객이 되죠. 승객이란 주체가 없습니다. 그렇게 규정되어 지는 거요. 가계가면 손님으로 규정되어지는 거요. 여러분들 엄마라고 하지만 아이와의 관계에서 규정되어지는 거요. 여러분들은 그 무엇도 아니에요. 사실은. 그때그때 규정되어지는 거요. 그런데 어떤 규정이 오래 가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자기인 줄 착각을 하게 되요.

애들 키우면 엄마 노릇 오래 하니까 여러분들이 엄마라고 착각하든지, 아내 노릇을 오래하면 아내라고 착각하든지, 선생님 노릇을 오래하면 선생님이라고 착각하고, 스님을 오래하면 스님이라고 착각해요.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니에요. 그때그때 의식이 이렇게 규정이 되어 집니다. 그래서 작용은 있습니다. 작용.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어떤 작용은 있다, 이 말이오. 그러나 그 작용의 주체가 그때그때는 주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하는 주체, 언제나 하는 주체, 그런 게 과연 있느냐? 이런 문제에요. 그런 게.

그래서 이것도 이렇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괴로움은 본래 없는 거야. 사성제를 고집멸도를 외우게 해도 여러분들 괴로움이 안 없어집니다. 그러나 저를 만나서 “왜 괴로운가?” 하고 제가 여러분께 계속 질문을 해서 여러분들 알음알이가 다 끊어지고, 백척간두에 서서 거기서 내가 등떠밀어서 더 밀어내면, 안 떨어지려고 모르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거기서 넘어가버리면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 이르는 것처럼, 이런 얘기 만 번 하는 것 보다 제가 여러분께 “너는 누구냐?” 이렇게 물었을 때, “네가 말하는 나라고 하는 게 누구냐?” 이렇게 물었을 때 이거다 저거다 이거다 저거다. 나가다가 이제까지 내가 아는 가아가 다 떨어집니다. 그러면 알음알이가 다 끊어집니다.

부처님 말씀 인용해서, 경전 말씀 인용해서, 선문구 인용해서 온갖 소리를 해도 이제 더 이상 못가는 알음알이가 다 떨어지면 그 다음에 물으면 “네가 누구냐?” 물으면 “모르겠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로 이 과제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여기서 안 넘어가집니다. 더 등떠밀어서 이제는 한풀 넘어가버리면, 여러분들이 해방이 온다. 자유가 오는 거요. 기쁨이 오는 거요. 거기에 무슨 진아니 가아니 자아니 뭐니, 이런 말이 붙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그 넘어가니까 진실한 나가 있더라. 다이아몬드 같은 내가 있어서 드디어 나를 찾았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이것은 깜깜한 무소식이다. 하나도 모르는 소식이오.

이것은 생각으로 지어서 하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말로 표현해서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하는 얘기만 했지, 진아니 가아니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니까, 진아는 있어야 되는데 왜 진아는 없다고 그럽니까? 스님께서 진아를 없다고 하는 것은 견해가 다릅니다.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저의 얘기는 진아니 가아니 이런 얘기가 아니라, 그것이 뭐라고 하든 불변의 요소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점검해 들어가 보면 그렇다고 주장할만한 것은 없다. 이런 얘기까지만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뭐가 있느냐? 그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어요. 왜? 그것은 그런 것이 없는 줄을 알아버린 경지에 가면 여러분들이 기쁨이 옵니다. 훤해져버립니다. 거기서는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의문이나 번뇌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알음알이로 자꾸 얘기를 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도 하고, 또는 우리가 토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통의 브라만들이 우리에게서 고유한 영혼이라고 하는 아트만이 있다하니까, 부처님께서 그거 그런 존재는 있지 않다. 이렇게만 말씀하셨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즉, 저 사람에게는 저 사람은 악연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악성이 있습니다. 이럴 때 악성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인연을 따라서 그런 작용이 있지, 그 사람에게 악성이라고 하는 성품이 없다. 이게 무아입니다. 독이라고 하면, 여기 독성이 있다. 우리 보통 이렇게 말하죠. 그러나 독성은 없습니다. 그런 물질이 그 작용을 할 때 독으로 작용을 하지 독성은 없습니다. 독성이 있다면 그것은 약이 될 수가 없죠. 그러나 그 물질이 약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약이라고 이름하고
독이라고 이름하지
존재는 독도 약도 없다.
이게 원래의 무아의 개념입니다.



질문4)
진아가 없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이신데, 나는 진아가 있다 없다 이런 말씀은 드린 적은 없습니다. 본인이 진아가 있다고 하니까 내가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본인이 들렸겠습니다. 진아의 유무를 떠나서 주관과 개관이 분리되지 않는 순수의식 상태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관찰자의 주관이면 외부 사항을 객관이라 하면 두 가지를 항상 나누어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나와 타자를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보는 가운덴, 제가 잘못 안 것입니까?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이시면, 나와 타자와의 관계설정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외부 사물을 어떻게 보는 것인지요. 스님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는 거 하고, 나라고 순간순간 인식되어지는 것이 있다는 거 하고는 별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라고 순간순간 인식되어지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늘 작용을 합니다. 거기에 잘 살펴보면 사실은 그렇게 순간순간 인식되어질 뿐이지, 거기에 뭔가 실체가 있어서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얘기요. 쉽게 말하면 어떤 센서가 뭘 알아차린다 해서 거기에서 알아차리는 어떤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프로그램만 있을 뿐이다. 이런 얘기하고 같은 거예요.

그 프로그램을 변경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것은 변경되어지지 않는, 언제나 있는 그런 아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지, 그 감지하는 주체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가 여러분을 볼 때 나는 지금 여러분들을 보는 작용을 합니까? 안 합니까? 하지. 이런 작용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늘 이런 자꾸 오해가 빚어지는 거 같아요.



질문5)
독립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근거로 현대물리학의 예를 설명하셨습니다. 분자설에서 원자설, 그 다음 광자, 전자, 양자, 중성자, 중간자등 소립자까지 이어지는 물리학의 이론을 봐도 불변자로서 요소에 대한 믿음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입증되고 있음을 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우 의문이 듭니다. 논의를 물질에 국한시켜볼 때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최후의 요소가 없이 끊임없이 나아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마치 수가 무한대로 이어지듯이 말입니다. 아니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불변의 물질요소는 존재한다고 전제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는 것이 연기와 무아를 올바로 보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마음공부하고 있잖아요. 그것을 예를 들어서 물질에다 얘기한 거요. 그러면 얼음에서 물이 되고, 물에서 수증기가 될 때, 상태가 변하잖아요. 그럼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상태잖아. 그러면 상태가 다르면 다른 물질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다른 물질이 아니고, 그 물분자의 결합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결합방식에 따라 우리 눈에 인식되어지는 상황이 전혀 달라지는 거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실은 똑같은 물분자로 구성되어있는데, 그게 상호 어떻게 결합되어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인식되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되어진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여기에 본질의 세계, 그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을 구성하는 본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니까 그것도 또 수소와 산소로 결합되어져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물분자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실체 같아요.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그것은 구성되어진 것일 뿐이에요. 구성되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면 이렇게 구성되어진 그 관계가 한 덩어리로 우리 눈에 보일 때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관계까지 들여다보니까 실체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더니 더 적은 원자라는 것이 관계 맺은 작은 것들이 또 있단 말이오.

그래서 그 작은 것들이 실체인줄 알고 또 들여다보니까 그것이 또 관계 맺어져있어요. 그 관계 맺어진 사이를 보니까 텅 비어있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까 다시 소립자라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실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이런 얘기요. 그럼 이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영원히 간다. 안 간다. 이런 것은 의미가 없어요. 그러면 지금 원자까지 왔으면 우리는 여기서 원자라고 하는 것이 실체로 인식되어지면 그것은 반드시 뭐다? 관계맺음이 있다. 이렇게 되겠죠. 이론적으로 말하면.

그런데 관계맺음이 있는 거기에는 다시 작은 요소가 있겠죠. 그러면 그것은 어떤 끝이 나서 근본 요소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어요. 여기서

무아라고 하는 용어의 핵심은
단독 알갱이는 없다.
우리에게 단독 알갱이로 인식되어질 때는
그것은 관계 맺음이다. 연기다.
이렇게만 이해하면 되요.

그러면 그것은 물질이랑 물질을 실체가 있게 인식되어지면 다시 연구를 하면 될 거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자아라고 인식되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 자아라고 하는 실체는 없는 거다. 관계맺음이다. 관계맺음을 보면 텅 비었겠지. 그러니까 실체가 없는 거다. 무아겠죠. 더 연구하니까 어떤 거기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있었다하면 그것은 진아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것 또한 그렇게 인식되어지는 게 찾아졌다면 더 깊이 관찰하면 관계맺음으로 간다. 이렇게 보면 되요. 그래서 우리는 텅 비었다가 아니라, 언제나 작용할 때는 자아가 있다? 없다? 있는 거요. 언제나 작용할 때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작용의 주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공 안을 떠나서 지속된 자아의 주체는 없다. 이런 얘기에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늘 자아가 작동하는 속에 자아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자아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은 늘 열린 자세로 있게 된다. 이 말이오.


질문6)
최근 중국과 미얀마의 대재앙을 보며 불교의 인과와 윤회가 떠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재앙을 업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연기론에 따르면 인이 있기에 과가 있으면 전생 현생 내생은 인과의 고리로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전생의 업과 결과로 이런 끔직한 과보를 받았다고 보기에는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런 불교의 연기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인과를 벗어나 우연적 요소가 삶과 세계를 지배하는 경우가 있다고 봐야 합니까?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 같은 분도 데바닷타의 암살기도로 상처를 입으신 적이 있다고 하는데, 부처님 같은 분이 이런 과를 겪으신 것을 업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답변 주시기가 어려우면 이에 대한 답을 얻을만한 스님의 저서나 다른 도서를 소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윤회나 인과응보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생긴다. 즉,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이생에 벌을 받는 거다. 미얀마에서 태풍이 일어나서 죽는 사람도 그렇다.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도 그렇다. 이렇게 하면 이것은 숙명론입니다. 즉 자연이 알아서 다 보복을 해 줍니까? 안 해줍니까? 해주지.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 행동을 보고 잘했니 잘못했니. 할 필요가 없죠. 그 사람은 나중에 다 보복할 건데 뭐. 누가? 자연이 알아서.

그런데 사람이 보통 자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보복하잖아. 그럼 성인의 가르침은 보복하라고 그래요? 즉, 원수를 갚으라고 그래요? 갚지 말라고 그래요? 그러면 원수를 갚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연을 보복을 해도 된다. 이렇게 가르치겠어요? 논리에 전혀 안 맞는 얘기에요.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 지진 일어나라고 해서 지진 일어났을까? 거기에서 부부 아닌 사람이 삿된 음행을 해서 지진이 일어났을까? 도덕이 문란해 지진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지각관의 역학관계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는 거요.

그것은 굳이 인과로 말하면 지중학적인 그 지질 구조 안에 어떤 원인이 있어서 이런 결과가 일어났겠죠. 그것은 사람이 착하고 선한 거 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그것도 다 그렇게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그건 지질 구조상의 역학적인 인과율에 의해서 일어난 거요. 그런데 그 지진이 일어난 지역에 사람이 안 살았으면 다치는 사람이 없을 거고, 거기에 대도시가 있었으면 죽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을 거고 그런 거지.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뜻하지 않게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다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된다?
그 아픔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구호하는 것이 뭐다? 자비심이다.

물질적으로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정신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위로를 해줘서 안심을 시켜주고.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그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말이오.

그런데 세상은 어떠냐? 내 일 아니기 때문에 외면하는 거요. 그때 물자를 가지고 한몫 돈 벌려고 그러고. 이게 이 세상의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비록 그런 재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을 편안하게 갖도록 보살펴 나가는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부부가 갈등이 있으면 “우리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너희는 원수라서 이생에 부부가 되어 그렇게 싸운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자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자기 고집을 내려놓으면 서로 화목해지죠. 또 서로 화목해지면 또 뭐란다? 너희는 전생에 천생연분이었나 봐. 또 이렇게 얘기하겠지. 그러니까 이런 것은 불법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냥 현실을 어떤 이유로 설명하려고 하는 얘기고,

우리는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게 부다담마.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이다. 이 진리의 가르침은 어떤 고뇌에 우리가 처하든, 우리를 늘 해탈의 길로 인도한다, 이거요. 부처님의 인격이 참 고상하셨죠? 그러기 때문에 너무너무 사람들이 존경을 했어요. 그래서 부나세다지왕은 자기는 권력을 쥐고 그 신하들에게 돈을 주면서, 총칼을 가지고 돈도 주고하면서, 이렇게 해도 자기 없는데서 자기 욕하고 쿠데타 일으키려고 그러고, 말해도 잘 안 듣고 이러는데, 부처님은 아무 주는 것도 없고, 칼을 들고 협박하는 것도 없고, 그런데 부처님 말씀하시면 다 귀 기울여 듣고, 부처님 없는데서 뒤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고, 너무너무 신기하다 이거야. 자기가 볼 때는.

도대체 부처님은 사람들이 순종을 하느냐? 이거야. 이럴 정도로 제자들이 부처님을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다 그랬을까요? 아니에요. 말 안 듣고, 계율을 어기고, 말썽을 일으키고 이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워서 부처님이 말해도 안 듣고 끝까지 싸운 사람도 있었어요. 고산비비구라고. 그 중에 데바닷타 같은 사람은 부처님의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제2의 부처가 되려고 욕심을 내어서 하려고 해도 안 되니까 부처님을 해치는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이것을 무슨 전생의 업이니 이런 얘기는 이제 윤회로서 자꾸 설명하려는 데서 나온 거예요. 여기서 부처님의 인격은 뭐에요? 그런 재앙이 닥칠 때도 부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괴로워하지 않으시고 다 그들마저도 구제를 하셨다. 부처님을 죽이려고 하는 앙굴리말라도 구제를 하시고,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이게 부처님의 인격이고. 부처님이 살아생전에 친족이 다 돌아가셨어요? 안 돌아가셨어요? 멸망했죠. 그럴 때 부처님께서는 친족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을 살생하는 것은 좋지 않잖아 그죠? 홀로 가셔서 그것을 막으셨어요.

뙤약볕에 앉으셔서 그 대군을 막으셨어요. 그러나 그들이 말을 안 듣고 끝까지 할 때 부처님은 그냥 보셨어요. 부처님이 군대를 동원해서 안 싸웠다. 그러나 반대로 부처님이 사람을 죽이든 살리든 개입 안하고 “나는 수행자니까.” 이렇게도 안하셨어요. 부처님은 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막으셨지만 어리석은 자가 무력으로 하는 것은 부처님도 어쩔 수도 없는 거요. 우리가 생각하는 부처님은 그것을 외면하는 부처님이거나 안 그러면 신통력을 갖고 다 군대를 없애버리는 부처님이거나 그런 것을 우리가 자꾸 상상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오늘 북한에서 동포들이 죽어간다면 우리의 붓다의 제자들이 이것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하나라도 살리려고. 그러나 이것을 안 한다고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자.’ 안준다고 ‘이명박 정권을 타도하자.’ 이렇게 가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호소해서 이 사태를 막으려고 최대한으로 노력을 해야 된다. 외면하는 것은 그것은 붓다가 가신길이 아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진리의 가르침이 있다.

저것은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굶어죽는 업보를 지어 굶어죽는다. 만약에 불교가 이런 게 불교라고 그러면 불교는 곧 이 세상에서 없어질 거요. 이것은 보복을, 자기 보복을 합리화한다. 이 말이오.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마라는 진리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이런데서 우리가 불교를 다시 봐야 한다.



자, 그 동안에 수고들 많이 하셨어요. 무려 25번에 걸쳐서 강의 들으시느라고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부지런히 정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로서의 여러분들의 믿음에 따른 신앙도 있어야 되지만, 우리가 이 반야심경을 강의하는 동안은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서 제가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분의 질문에 스님은 돈오돈수를 긍정을 안 하시고 돈오점수를 긍정하십니까? 이런 질문도 있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제가 비파사나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까 그런가 봐요. 우리가 해탈로 나아가는 수행법에는 남방불교에는 관법수행이라고 하는 비파사나가 있습니다. 대승불교에는 간경수행이 있습니다. 정토종에는 염불수행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밀교에는 주력수행이 있습니다. 선에는 참선이 있습니다. 선정에는. 여기에도 五家七宗오가칠종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간화선, 화두선은 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화두선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소위 말해 임제종, 그것을 개선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속이 되어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그 임제종의 가르침의 원형은 육조혜능대사의 가르침이란 말이오. 육조혜능대사의 가르침을 돈오돈수로 볼 거냐? 돈오점수로 볼 거냐? 하는 이 논쟁입니다.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것은요.

그런데 비파사나는 이거와는 다른 가르침에 속한다. 그러니까 제가 반야심경 안에 소승가르침이 있죠. 그 소승가르침이 뭐냐? 라는 설명을 할 때 비파사나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건강이 안 좋아서 어떤 운동을 하면 좋습니까? 그럴 때 어떤 사람이 조깅이 제일 낫다. 어떤 사람은 축구가 좋다. 농구가 좋다. 배구가 좋다. 체조가 좋다. 요가가 좋다. 이럴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의사는 “건강을 위해서 운동 좀 하십시오.” 이게 의사의 가르침이란 말이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오. “어떤 운동을 할까요?” 그것은 어떤 운동을 해도 좋죠. 그러나 인연을 따라서 조건을 따라서 운동 종목을 선택해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조깅이 좋다. 그래서 전부 조깅을 해요. 조깅이 좋다는데 너무 빠져서 그저 환자까지도 다 아침에 달리기를 시킨단 말이오. 그래서 부작용이 생겨요. 그러면 여기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겠어요? 조깅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걷기가 좋다. 이런 사람 걷기해보니 훨씬 좋단 말이오. 그러면 조깅은 틀렸다. 걷기가 제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죠.

그러기 때문에 각 역사 속에 흘러오다가 각 종파별로 나름대로 수행법이 있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참선수행법을 가지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 화두선 수행법을 가지고 있다. 그 화두선 수행법 안에서 돈오점수니, 돈오돈수니 하는 하나의 수행방법을 싸고, 또는 검증을 싸고, 이런 하나의 토론이 있다. 그래서 너무 이렇게 자꾸 나누고 언쟁적으로 하기 보다는 실제로 행하는 것, 실제로 행하는 것에 중요성을 두시고, 해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해야 됩니다.

해보면서 자기가 자기화 시켜가면서 질문을 하면 너무 점진적인데 치우쳤다 싶으면 단박에 뛰어넘는 도리를 얘기를 해야 되고, 너무 단박에 뛰어넘는 일확천금을 누리듯이 허황되면 점진적인 도리를 가지고 그 병을 치유해야 된다. 이렇게 공부를 여러분들이 하나하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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